불천노(不遷怒)와 불이과(不遷過)

늘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기는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이 형제님께서는 날마다 다가오는 스트레스로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본당의 신부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힘듦을 구구절절 이야기했지요. 그리고 자기도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 지금 어딘가를 급히 다녀와야 하는데, 다녀올 동안 이 짐 좀 들고 기다려 달라고 하십니다. 신부님의 대답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신부님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면서 이 짐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짐이 그리 무겁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짐을 들고 있는 것이 팔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너무 힘든 것입니다. 한 30분쯤 지났을까요? 신부님께서 오셨습니다. 신부님을 보자마자 너무 힘들어 “신부님, 이 짐은 언제까지 들고 있어야 합니까?”라고 형제님께서는 물었습니다. 이 말에 신부님께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이야기하셨다고 하지요.

“힘들면 내려놓지. 왜 아직까지 들고 있어?”
바로 이 순간에 이 형제님은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하지요. 지금까지 자신을 힘들게 했던 모든 고민거리들이 지금 들고 있는 짐처럼 느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냥 내려놓으면 될 것을, 바보처럼 머리를 싸매고 힘들게 들고 있었던 것이지요.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생각나서 약간 각색해서 꾸며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생각나는 것은 정말로 우리는 내려놓아야 할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힘들어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걱정하고 있고,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고 있는 모습, 그런데 중요한 것은 걱정하고 집착하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저 힘들기만 할 뿐입니다.

힘들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마음의 짐들을 하나씩 내려놓을 때, 훨씬 더 가볍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성인 대축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성인들의 이 세상 삶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신 분이었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았고, 고통과 시련이 동반하는 걱정들까지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통해 내려놓으셨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하실 수 있었고,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차마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차마 내려놓지 못하면 그만큼 하느님과도 멀어질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성인들이 보여주셨던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희망을 간직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기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인으로부터 전달받은 아침 묵상글이 내게 일침을 가하는 구나.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힘들게 왜 혼자서 마음의 짐들을 갖고 있었는지..
차마 내려놓지도 못하면서 더 많은 것들을 잃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말이다.
힘들면 내려 놓아야 하는 것, 당연한 진리를 혼자 거스르고 있었구나...
이젠 더 이상 어리석지 말자. 그릇된 것을 반복하지 말자. 

내 안의 노여움, 내 안의 불안을 힘겨워하며 남에게 풀기 이전에 내 자신이 내려 놓아보자.
불천노(怒)와 불이과(過) 자신의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고, 같은 허물을 두번 다시 되풀이 하지 않는다.



주님, 제 영혼을 당신의 평화로 지켜 주소서.

11월 첫 마음 첫다짐을 다시 새롭게 마음에 담으며 또한 지난주일 엄마와 명동성당 다녀온 마음을 되새기며...
그 동안 성가정 생활을 외면했던 마음들, 내 자신의 게으름과 말도 안되는 합리화들을 들먹거렸던 내모습
이젠 더이상 내 자신을 괴롭히는 일도 안 만들며 나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온 내 모습들을 주님은 보셨는지 아시는지..
내게 온 말씀 구절이 내 마음 속 깊이 오래 오래 담긴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필리4.4


주님 안에 그 모든 답이 있었는데.. 바보같았던 내 모습에 반성의 눈물이 난다.
그렇게도 많은 기회를 주셨었는데.. 이렇게도 많은 사랑을 주셨었는데..
그 동안 나만 모르고 나만 강한척하며 멀리 멀리 돌고 돌아 이제야 왔구나.. 
그래도 더 늦지 않게 불러주심에 이 또한 행복하고 죄송합니다.



2015.11.3(화) 연중 31주간 화요일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12.5-16

  형제여러분, 우리는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고, 봉사면 봉사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쓰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면 순수한 마음르로, 지도하는 사람이면 열성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 주님, 제 영혼을 당신의 평화로 지켜 주소서.
주님, 제마음은 오만하지 않나이다. 제눈은 높지도 않사옵니다. 감히 거창한 것을 따르지도, 분에 넘치는 것을 찾지도 않나이다.⊙
오히려 저는 제 영혼을 다독이고 달랬나이다. 제 영혼은 마치 젖 뗀 아기, 어미 품에 안긴 아기 같사옵니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알렐루야.
주님이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2015년 2월 11일 새벽 4시경에 눈을 뜬 상태로 숨을 멈추었고 
오후 4시경에 우리 한지를 한지로 쌓아 흙으로 돌아가라고 묻어 주었다.
몸에 온기가 남아 있었지만.. 더 붙들고 있으면 보낼 수 없을꺼 같아 부랴 부랴 가족 산소로 옮겨 
이제는 편안히 잠들도록 혼자 남겨두고 왔다.
기차를 타고 이동하며 많은 추억과 생각이 스친다.
참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하고.. 아쉬움도 많고.. 함께 해주어 행복했는데 말이지..

새벽에 한지가 죽었다는 아빠의 말에 진정이 안되었지만 땅을 파고 흙으로 덮어주었을 땐 
그래도 마음이 편안했는데.. 
어제밤 우리 한지가 없는 집은 그리 썰렁할 수가 없었다. 
강인해지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지만 벌써부터 그리워 밤새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이렇게 하루 하루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마음을 다잡다 보면 
얄미울 정도로 금새 또 삶에 적응을 해가겠지..
이렇게 큰 아픔은 처음이라..
이런 아픔은 겪지 않으면 좋으련만...

14년 키우던 강아지를 산소에 묻고 오던 길 기차안에서 나는 
"최승자 시집의 쓸쓸해서 머나먼"으로 우리 한지의 허전함을 달래어 보았다.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없는 것은 아니다
나무들 사이에 풀이 있듯 
숲 사이에 오솔길이 있듯

중요한 것은 삶이었다
죽음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거꾸로도 참이었다는 것이다

원론과 원론 사이에서
야구방망이질 핑퐁질을 해대면서
중요한 것은 죽음도 삶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삶 뒤에 또 삶이 있다는 것이었다
죽음 뒤에 또 죽음이 있다는 것이었다

시편 7 
@ 주 하느님,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ㅇ 주 하느님, 당신께 피신하오니, 뒤쫒는 모든 자에게서 저를 구하소서, 저를 구해 주소서. 사자처럼 이 몸 물어가지 못하게 하소서. 아무도 구해 주는 이 없나이다.

ㅇ 주님, 제 의로움, 제 결백을 보시고,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이제 악인들의 죄악은 끝내시고, 의인들은 굳세게 하소서.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하느님은 의로우시다.

ㅇ 하느님은 나의 방패, 마음 바른 이들을 구하시는 분. 하느님은 의로우신 심판자, 하느님은 언제든 진노하시는 분.


시편 43

하느님,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불충한 백성에게 맞서 제 소송을 이끌어 주소서. 거짓되고 불의한 자에게서 저를 구해 주소서.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의 힘이시옵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지난 주 미사 중에 제 2독서가 그렇게 마음에 와 닿더니 그 시기가 내게도 왔나보다 했는데 이번주가 아주 최고로 힘든 시기인 듯 싶다. 이 힘든시기가 한꺼 번에 몰려왔다 가고 나면 내가 좀 더 지혜로운 사람으로 성숙되어 있기를 바래본다.


제 2독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5.15-20
형제 여러분, 15.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16.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17. 그러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18.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19.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20.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신정일의 길]이해와 오해의 차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 만남을 통해서 이런저런 인연들이 맺어지고, 그 인연의 연결고리를 통해 조화로운 관계를 맺으며 한 단계 성숙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부조화 속에 그 인연들이 부질없는 것으로 마무리되기도 한다. 그 저간에는 우스개로 말해서 ‘이해(二解)에다 삼해(三解)를 더한’ 오해(誤解)가 있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시를 가지고서도 세상을 놀라게 한 사람이지만, 이 세상이라는 큰 마당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관계도 날카롭게 묘사한 사람이다. “세상은 오직 오해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서로 합의하는 것은 전반적인 오해에 의해서다. 왜냐하면, 만약 불행하게도 서로 상대를 알게 된다면, 결코 합의할 수 없을 터이니까.” 보들레르의 <내밀일기>에 실린 글이다. 탁견이다. 이해가 아닌 오해에서 비롯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이해와 오해의 불협화음 속에서 사람들은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우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 보들레르는 그 오해를 다음과 같이 옹호하고 있다.

“거의 모든 인간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에 있어서도 우호적인 합의는 오해의 결과이다. 오해, 그것이 곧 기쁨이다. 사내가 외친다. ‘오! 내 천사!’ 여자는 우짖는다. ‘엄마, 엄마!’ 그러고는 이 두 바보들은 자기들이 똑같이 생각한다고 확신한다.”


어디 보들레르만 그랬을까? 법정 스님도 잠언 속에서 오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누가 나를 치켜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낼 일도 못된다. 그건 모두가 한쪽만을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이다.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가 아닌가.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달린 것이다. 실상은 말 밖에 있는 것이고, 진리는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는다.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이다.”

오해와 이해, 그 설명하기 힘든 짧은 간극 속에 요지경 같은 인간들의 삶이 있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불협화음에서 가장 아름다운 협주를 만들어낸다.”
그렇다. 오해와 이해 사이의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차이에서 항상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이 우리네 삶이며, 종국엔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에서 잠시 살다 가는 것이다.

출처 : 경향신문 오피니언 [신정일의 길]
"너 자신에게 충실하라"

즉, 무엇을 할 때 다른 사람이 그것을 하면 자기 자신도 기뻐할 수 있을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나서 행동에 옮기라는 것. 책임을 뜻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일체의 모든 책임, 자기 자신 그리고 타인에게 미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이 그것이다.
임마누엘 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