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지난 주 미사 중에 제 2독서가 그렇게 마음에 와 닿더니 그 시기가 내게도 왔나보다 했는데 이번주가 아주 최고로 힘든 시기인 듯 싶다. 이 힘든시기가 한꺼 번에 몰려왔다 가고 나면 내가 좀 더 지혜로운 사람으로 성숙되어 있기를 바래본다.


제 2독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5.15-20
형제 여러분, 15.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16.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17. 그러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18.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19.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20.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신정일의 길]이해와 오해의 차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 만남을 통해서 이런저런 인연들이 맺어지고, 그 인연의 연결고리를 통해 조화로운 관계를 맺으며 한 단계 성숙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부조화 속에 그 인연들이 부질없는 것으로 마무리되기도 한다. 그 저간에는 우스개로 말해서 ‘이해(二解)에다 삼해(三解)를 더한’ 오해(誤解)가 있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시를 가지고서도 세상을 놀라게 한 사람이지만, 이 세상이라는 큰 마당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관계도 날카롭게 묘사한 사람이다. “세상은 오직 오해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서로 합의하는 것은 전반적인 오해에 의해서다. 왜냐하면, 만약 불행하게도 서로 상대를 알게 된다면, 결코 합의할 수 없을 터이니까.” 보들레르의 <내밀일기>에 실린 글이다. 탁견이다. 이해가 아닌 오해에서 비롯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이해와 오해의 불협화음 속에서 사람들은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우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 보들레르는 그 오해를 다음과 같이 옹호하고 있다.

“거의 모든 인간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에 있어서도 우호적인 합의는 오해의 결과이다. 오해, 그것이 곧 기쁨이다. 사내가 외친다. ‘오! 내 천사!’ 여자는 우짖는다. ‘엄마, 엄마!’ 그러고는 이 두 바보들은 자기들이 똑같이 생각한다고 확신한다.”


어디 보들레르만 그랬을까? 법정 스님도 잠언 속에서 오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누가 나를 치켜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낼 일도 못된다. 그건 모두가 한쪽만을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이다.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가 아닌가.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달린 것이다. 실상은 말 밖에 있는 것이고, 진리는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는다.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이다.”

오해와 이해, 그 설명하기 힘든 짧은 간극 속에 요지경 같은 인간들의 삶이 있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불협화음에서 가장 아름다운 협주를 만들어낸다.”
그렇다. 오해와 이해 사이의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차이에서 항상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이 우리네 삶이며, 종국엔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에서 잠시 살다 가는 것이다.

출처 : 경향신문 오피니언 [신정일의 길]